전시정보
시선의 이동 없이 촬영한 전원풍경은 사각프레임 안에 멀리 보이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언뜻언뜻 들리는 대화소리, 살랑거리는 바람까지도 살아있는 구성원으로 동참시킨다. 고정된 카메라는 한동안 한적하고 평온한 전원풍경을 비추고 있지만, 이내 골프 카트를 타고 완만한 언덕을 오르는 일련의 무리를 감지하고 지금 지켜보고 있는 장소가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박지혜 작가가 주목한 이곳은 태안반도 간척지에 조성된 골프장이다. 신작 <어느 쪽도 아닌>은 가장 자연스러운듯한 인공의 표면을 포착하며, 인식의 불편함이나 정서적 불안이 감지되는 틈에서 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을 탐색한다. 아름다움을 압축한듯한 영상은 간척지 생태환경을 파헤치는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전원생활의 의미를 되묻는 서사도 아니다. 영상은 말없이 간척지 일대를 조망하다가, 농경지가 아닌 인공으로 조성된 자연의 풍경 – 골프장을 비춘다. 감각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항상 언어와 권력, 사회적 구조 안에서 정치적으로 작동한다. “간척지는 인간이 바다를 가두고, 육지를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공의 지형이다.”1)이 공간은 산업화에 대한 욕망의 흔적이자 생태계 교란의 결과이며, 단절된 생명을 포기하면서 뭍으로 이어낸 자리라는 점에서 단순한 풍경을 넘어선다. 간척지, 공장지대, 복개된 하천, 골프장 등은 겉으로는 개발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망각의 시간과 억눌린 기억이 축적된 땅으로, 이러한 반복은 감각의 중립성을 흔들며 감정의 잔재를 중첩한다. 작가는 이 공간에 감각의 카메라를 밀착시키고, 그 표면을 ‘피부’처럼 다룬다. 피부는 ‘신체’가 되고, 땅의 표면은 안과 밖을 연결하는 복잡한 층위로 기능하며 감정이 각인된 지층이 된다. 이번 전시 《On the Surface》에서 박지혜 작가의 시선은 하늘과 뭍, 그리고 바다의 (비)경계를 따라 움직인다. 태안지역의 하늘과 뭍과 바다는 구분되어 있으나 서로를 반영하면서 모호한 층위를 형성한다. 박지혜 작가는 롱테이크 기법과 함께 비동기적 구성방식을 통해, 기억과 망각, 감각과 사유, 존재와 부재사이의 미세한 경계, 그 틈을 파고든다. 태안 간척지를 배경으로 신작 영상과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archival pigment prints)는 “인간의 욕망과 자연의 시간, 보이지 않는 역사와 퇴적된 감정이 교차하는”2) 경계면을 탐색한다. 그것은 시공간의 흐름과 감각의 축적이 겹친, “가장 얇고 평평하며 동시에 가장 깊은 감각적 지층이다.”3) 〈어느 쪽도 아닌〉, 〈떠도는 시선, 반사된 표면〉, 〈경계의 지면들 2,3〉 등 신작은 모두 간척지 위에 세워진 골프장, 산업단지, 제방과 늪지 등 실재하는 물리적인 공간을 다룬다. 여기서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기억의 매체이자, 사회적 은유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감각적 스크린”4)으로 기능한다. 간척지라는 공간이 보여주는 “일견 아름답고 질서 있는 장면들은, 실상 그 이면에 감추어진 폭력의 흔적과 개발의 이름으로 파괴된 생태, 그리고 목적을 상실한 채 방치된 기억의 구조물”5)을 내포한다. 달리 말하면, 박지혜의 영상은 감각이 ‘즉각적이고 진실된 것’이라는 믿음을 조심스럽게 흔든다. 정지된 장면은 감각을 유예하고, 표면은 감정을 미끄러뜨리는데, 바로 이러한 틈에서, 관객은 ‘보지 못한 감정’, ‘말해지지 않은 역사’를 감각하게 된다. 이는 현상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감각의 지연, 억압, 비가시성의 구조를 영상으로 구현한 결과일지 모른다. 〈경계의 지면들 2,3〉이 시선의 파편과, 반복적인 풍경의 결,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고정된 시점과 부유하는 시선으로 수집하고 구성한다면, 〈떠도는 시선, 반사된 표면〉은 소설 『상록수』의 내러티브를 은밀히 중첩시킨다. 근대화에 대한 이상과 진부한 사랑의 방식이 공존하는 『상록수』는 박지혜 영상이 다루는 공간의 이중성과 중첩된다. 주인공의 열망과 희생, 그리고 전형적인 이별 서사는 개발된 땅 위에 반복적으로 퇴적된 감정구조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간척지와 계몽주의 서사는 단지 감상의 코드가 아니라, 진부한 감정과 기억의 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인 것이다. 두남녀의 내레이션은 인공제방과 화력발전소의 잔해를 가로지르다 휘발되고, “결국 지워지고, 다시 하나로 이어지죠…”6)라는 문장으로 비동기적 흐름을 동기화한다. 그의 영상은 특정 사건의 직접적인 재현이나 비판 없이, 내밀한 심리의 풍경을 탐색하는 장치로 앰비언트 사운드, 인물의 내레이션과 몸짓을 비동기적으로 엮으며 서사의 틈을 만들고, (비)가시적이면서도 실존적인 감각의 이중적 층위를 드러낸다. 이번 전시 《On the Surface》에서 박지혜 작가는 간척지라는 이질적 풍경을 통해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공, 기억과 소외의 경계를 재배열한다. 박지혜의 초기작에서 등장하던 남성과 여성의 관계, 불완전한 욕망, 신체의 상호작용 등은 내밀한 심리의 풍경을 탐색하는 장치였다면, 자본주의 논리가 응축된 장소의 반복은 사회구조 안에서 정동적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단지 공간에 대한 시각적 해석이 아니라, 감각의 정치학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어낸 지형이 어떻게 역사적 층위를 품게 되는지, 그 안에서 무엇이 말해지고, 무엇이 사라지는지를 작가는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1)국토지리정보원, 해양조사연보(2020)에서 인용 2)박지혜, 《On the Surface》 작가노트, 2025 3)박지혜, 《On the Surface》 작가노트, 2025 4)박지혜, 《On the Surface》 작가노트, 2025 5)박지혜, 《On the Surface》 작가노트, 2025 6)<떠도는 시선, 반사된 표면> 남녀의 내레이션에서 *출처: CR Collec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