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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
《불타는 집 House on Fire》
Exhibition Poster
기간| 2024.05.25 - 2024.06.22
시간| 12:00 - 18:00
장소| 에스더쉬퍼코리아/서울
주소| 서울 용산구 녹사평대로46가길 6
휴관| 일, 월, 공휴일
관람료| 무료
전화번호| 0507-1471-2040
사이트| 홈페이지 바로가기
작가|
흑표범, 최하늘, 이예은, 이해민선, 서찬석, 손현선, 양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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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 전시전경

    Exhibition view: 불타는 집/House on Fire, Esther Schipper, Seoul, 2024. Photo © Hyun Jun Lee

  • 전시전경

    Exhibition view: 불타는 집/House on Fire, Esther Schipper, Seoul, 2024. Photo © Hyun Jun Lee

  • 전시전경

    Exhibition view: 불타는 집/House on Fire, Esther Schipper, Seoul, 2024. Photo © Hyun Jun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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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hibition view: 불타는 집/House on Fire, Esther Schipper, Seoul, 2024. Photo © Hyun Jun Lee
  • 			[전시 개요]
    
    에스더쉬퍼 서울은 2024년 5월 25일(토)부터 6월 22일(토)까지 한국 작가 단체전 《불타는 집》을 연다. 이정식 작가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지난해 에스더쉬퍼 서울과 베를린에서 동시에 개최한 《뒤집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여는 한국 작가 단체전이다. 이번 전시는 흑표범(b. 1980, 서울), 최하늘(b. 1991, 서울), 이예은(b. 1994, 서울), 이해민선(b. 1977, 서울), 서찬석(b. 1983, 서울), 손현선(b. 1987, 서울), 양정화(b. 1973, 목포) 등 7인의 작가가 기획자의 단편 소설, 『코가 부러진 피노키오의 서른 번째 크리스마스』(2023)를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인다. 소설은 보호받지 못한 이의 분노와 증오의 감정에 주목하고, 부정적인 전이(negative transfer)와 같은 상태, 억압된 기억이 표출되며 드러나는 감정의 언어들로 직조한 이야기다. 7인의 작가는 회화, 드로잉, 사진, 조각, 영상 등 다채로운 작품으로 각자의 고유한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재상상하고 재구성한다. 
    
    약자의 분노와 증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바라보는 한국 작가 7인의 다채로운 관점
    이정식은 장애인 활동 지원사로 4년 여간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코가 부러진 피노키오의 서른 번째 크리스마스』를 집필했다. 카를로 콜로디(Carlo Collodi)의 원작 중 핵심이 되었던 피노키오의 코가 부러진 채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 속 피노키오는 더 이상 순진한 어린 아이가 아닌 서른의 청년이다. 가난, 장애, 병으로 인해 달라진 모습으로 폭력과 차별을 당하며 ‘괴물’로 불린다.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상태로 자신의 근원이 되는 집을 파괴하고 결국 시설에서 죽음을 맞는다. 소설은 그 자체로 선명한 이미지를 가진 이야기이지만, 작가들은 서사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각자의 고유한 작품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번 전시에서는 언어를 초월하는 교감에 대한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과 조각으로 구성한 흑표범의 설치, 다양한 재료로 분절된 신체를 나타내는 최하늘의 조각, 초현실적 풍경을 만들어낸 이예은의 사진, 주변화되고 방치된 사물로부터 ‘버티는 개인’을 보는 이해민선의 회화, 이야기 속 파편으로만 존재하는 존재들을 드러내는 서찬석의 드로잉, 수행하는 몸짓을 평면 위에 체화하는 손현선의 회화, 제어할 수 없는 우연의 상황을 적극 활용하는 양정화의 드로잉과 조각 등 이야기에 대한 작가 7인의 다채로운 ‘변주’들을 볼 수 있다. 
    
    
    
    [전시 서문]
    
    부러진 자리로부터
    
    -	남웅 (비평가)
    
    2023년 이정식이 발표한 단편소설‘코가 부러진 피노키오의 서른 번째 크리스마스’에서는 원작의 핵심이 되었던 피노키오의 코가 제목 그대로 부러진 채 발견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관절이 끊어지고 주먹이 부서졌는데도 소설은 제목부터 코에 집중한다. 불편한 소설은 누가 왜 부러뜨렸는지에 대한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함까지 갖춘다. 알 수 있는 건 코가 부러졌고, 그는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외양과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부러진 코와 부서짐이라는 구멍
    
    코가 부러진 자리는 하나의 구멍으로, 텍스트의 세계관을 두루 조망할 렌즈로 삼을 수 있다. 무엇이 코를 부러뜨렸는지 끝내 알리지 않는 미제의 사건은 더이상 추리 되지 않는다. 다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영구히 발생할 손상과 부서짐의 서사, 손상되고 부서진 서사, 외려 손상과 부서짐으로만 가득 남아버린 행렬이다. 코는 더이상 없다. 제페토는 손상된 몸을 고쳤을 망정 코를 덧대지 않았다. 외려 피노키오의 코가 부러진 뒤부터 자신의 몸을 내팽개치고 망가질 대로 망가져 그를 향한 동정마저 증발시킨다. 부러짐에 포획된 피노키오는 원작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명랑함과 대책 없는 모험 대신 속수무책으로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자신 역시 누구도 신뢰하거나 동정하지 않는다. 그의 불행은 코가 부러지면서 시작된 것일까. 혹은 그 전에, 상존해온 폭력을 피노키오의 코가 부러지고 몸이 망가지고서야 사후적으로 알게 된 것은 아닐까.
     
    다행히(다행일까?) 피노키오는 몸이 부서진 뒤에도 여전히 말을 하고 사물을 지각하며 판단한다. 다른 게 있다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판단할 지표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코가 부러진 트라우마가 원인이 되었을지, 혹은 양심의 척도가 사라져 구태여 숨기지 않아도 되는 정동을 표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세상을 냉소하면서도 자기를 혐오하고 타인을 불신하며 자신도 타인도 해한다. 양심의 결계가 무너진 것일까. 알 수 없다.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된 것일까. 거짓말을 해도 아무도 모른다면, 거짓말을 해도 거짓을 판단할 지표가 없으니 피노키오는 더이상 자신의 그늘을 숨길 이유도, 숨길 수도 없다. 죄책감과 양심을 가질 수 없을 만큼 삶을 포기하는 자리에는 믿음도 무엇도 없다. 타인뿐 아니라 자신을 연민하거나 돌볼 자리도 없다. 다가오는 구원의 손길 마저도 거부할 만큼 그는 위선을 투명하게 비추고, 당신이 나를 구원할 수 없음을 폭로하며 구원을 바라지 않노라 확신한다. 죽이거나 죽고 나서도 증오로 가득한 모습을 ‘부정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긍정했던 것, 적어도 부정하기 이전의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코가 붙어 있을 적의 모습일까, 정상적인 인간이 되고자 하는 불가능한 소망일까. 
    
    피노키오의 원작자 카를로 콜로디는 독자의 원성과 밀린 고료를 받고나서야 이전에 죽여버린 피노키오를 되살려 기어이 사람으로 만들어냈다고 한다. ‘코가 부러진 피노키오의 서른 번째 크리스마스’는, 차라리 원작자가 뒤늦게 받은 고료에 거둬버린 그늘을 전면화한 것처럼 보인다. 텍스트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환경에 부정성은 예외가 없다. 사람들이 신뢰를 보이며 의심없이 믿는 대상은 돈의 질서고 강약약강의 관계다. 당신을 향한 선의는 나의 위신을 위한 도구이기에 단편적이며 허위일 수밖에 없다. 구원의 유혹은 냄새도 촉각도 없는 환각처럼 출현한다. 그것은 다분히 사회의 계층과 계급성에, 구획된 사회가 제공하고 유혹하는 소비와 환상의 장치들에 기반한다. 유사인간 피노키오는 조롱받고 괴롭힘 당하기 일쑤이고, 비인간 동물은 사람에게 선의의 대상이기 쉽다. 고양이무덤처럼 누구도 모르게 살해당하고 사라질 수 있으며, 그 사실마저 기억될 수 없다. 인물들은 함께 힘을 모아 싸우기보다 서로를 속이고 착취하며 자신도 타인도 세계도 파괴한다. 지독하게 사려 깊은 소설은 성탄절의 산타클로스까지 등장시켜 언제고 위험에 목숨을 잃고 교체할 수 있는 인력으로, 상품 이미지의 향연 속에 산재의 엄혹함을 감추고 마는 현실의 단면을 담는다.   
    
    피노키오의 세계는 반사회적이지만 철저히 반사회적이기에 사회를 겨눈다. 소설은 처절하리만큼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장치들을 배제하지만, 이토록 배제하기에 무엇이 누락되었는가를 찾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파국은 우리에게 안전을 보장할 제도와 공동체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감각하게 한다. 부러진 코의 자리는 위계를 벗기고 힘의 질서를 제지할 어떤 것들도 상상하고 제안하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시혜의 대상으로 남아 시설과 요양병원에 방치되는 이는, 그를 농락한 이를 불태우고 독살하며 자신마저 방치하고 파괴한다. 피노키오의 코는 타인의 폭력에 부러질 수 있지만, 절망 속에 스스로 베어버렸다는 가설도 무리는 아닐 터. 연민과 관용, 동정과 선의까지도 부정하겠다는 처절한 결의는, 타인과 자신에 대한 의존과 욕망을 거세함으로써 일말의 인간성까지도 박탈한다. 그것이 비인간 피노키오가 자신의 인간됨을 절멸시켜 역설적으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을 이뤄낸 것은 아닐까.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말들
     
    코가 부러진 피노키오에는 여러 은유와 사회의 요소들이 교차한다. 피노키오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는 인종과 장애, 가난을 붙일 수 있고, 그를 향한 조롱과 폭력, 위선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망가진 세상에서 회복 불능성에 동일시한 이는 희망과 긍정을 처절하게 부순다. 부러진 코의 구멍은, 관용과 인정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임을, 나는 정상이라는 안심이 들게 하는 구실로 만들고 있음을 폭로한다.
    
    타인에 대한 환멸과 자신에 대한 연민도 사라진 자리에 피노키오는 스스로 생을 포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이유를 굳이 찾기보다, 그럼에도 죽지 않으면서 타인을 향한 복수와 응분의 절멸 외에 그가 하는 일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전하는 것이다. 타인의 의사에 아랑곳 않으며 전하는 이야기 덕분에 독자는 생을 끝까지 가져간 피노키오의 삶이, 살만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의 삶이 어떤 배경과 역동을 갖거나 상실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피노키오를 비롯해서 신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쪽 다리를 잃은 여우를 지나 일련의 잔혹극을 들려주는 저자에 이르기까지 독자와 관객에게 의도치 않게 파국으로부터 선의와 책임을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전시를 기획한 이정식이 활동보조 경험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썼다는 배경을 구태여 언급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이야기는 그를 끊임없이 소환하지만 그와 처절하게 분리되어 다시 저자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하지만 다시, 라는 도돌이표. 불가능한 미션은 이중의 고리를 맴돈다. 지독하고 피곤한 당사자의 자리, 하지만 그렇기에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나르시시즘의 극도로 음화 된 마이너스의 자리는 그에게서 시작하지만, 결국 구멍으로 남아 홀로 껴안을 수 없는 자리를 함께 가리킨다.
    
    
    부러진 코의 구멍을 더듬는 일
    
    2023년 12월 23일 이정식은 낭독회를 진행했다. 그는 을지로의 예술공간이자 사업장이기도 한 육일봉에 사람을 모아놓고 현장에서 낭독자를 섭외하여 각 장마다 자신의 소설을 낭독하고 듣는 시간을 가졌다. 사전에 텍스트를 나누지 않은 발표회에서 참가자들은 낭독자의 목소리를 따라가야 했다. 숨죽여 듣는 중에도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간간히 튀어나오는 절단된 신체, 부서진 몸, 불타는 집의 거친 표현이 인상으로 각인했을 자리, 메시지 전달이 성공하지 쉽지 않은 이 자리는 그럼에도 시도되었다는 점에 징후적이었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듯한 프로그램은, 그렇다고 작가의 자의식적 만족을 충족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자리를 망치거나 분위기를 전환하는 일 없이 충실하게 오독하거나 이해에 실패하고, ‘이상하다’ 정도의 감상을 남기며 떠났던 자리는, 지금의 전시를 예비하기 위한 구름판이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작가들을 불렀다. 피노키오가 타인을 죽이고 스스로도 파괴하기 위해 여우와 고양이를 부르고 제페토를 찾았다면, 부러진 코와 불타는 집, 파괴된 관계의 자리, 부서진 세계관에 작가들을 부르는 저자는 이야기꾼에서 기획자로, 미션을 던지는 이로 태세전환을 꾀한다. 그것이 불타는 집을 수습하고 코를 이어달라는 요청이거나, 삽화처럼 설명적인 이미지를 붙여달라는 요청은 아닐 것이다. 초대에 응한 작가들은 소설을 받아 들고 그로부터 분기하는 창작물을 제작한다. 
    
    초대에 응한 이들이 무언가를 창작한다면 소설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보충하는 주변의 역할을 상상하거나 여느 선한 이들처럼 봉사와 치유를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태도들은 부서짐을 부서짐의 울타리에 가두고 만다. 기획은 작가들에게 하나의 장마다 자리할 수 있도록 제안하는데, 그렇다고 이들이 의무적으로 할당된 장에 머물 필요는 없다. 작가들이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주어진 세계에 온전히 함몰되지만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작가들은 소설 속 인물들처럼 타인의 이야기에 냉담하거나, 요정처럼 일방적으로 나타나 그를 섣불리 구원하겠다고 제안하는 일도 없다. 이들은 피노키오의 부서진 세계를 받아 안지만, 온전히 주어진 장에 편입하여 기대를 충족할 필요가 없고, 더러는 창작자와 줄다리기를 하며 주어진 자리를 재가공 할 수 있다. 세계에 던져졌지만 규범적 양식을 체화 하면서도 그로부터 온전히 동일시하지 않거나, 전략적 동일시를 취하고 때론 반목을 꾀하는 점에 이들은 비극으로부터 비평적 거리와 미적 재현 가능성을 확보한다. 삐딱하되 적대하지 않고 사려 깊으면서도 소설의 태도와 불화하는 이들은, 부서진 피노키오의 서사를 부수는 이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 작가들은 텍스트를 부수고 의도적으로 오독을 실천하는 독자이자 피노키오의 비평적 동료이기도 하다. 집이 불타 부서지는 일을 다시 부수는 작업은, 집을 복원하고 손상된 몸을 이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란 말인가. 부서진 몸을 다시 돌아보고 기억하는 일, 혹은 돌아갈 수 없음을 새기는 이들은, 부서지기 전의 상황을 복원해야 할까. 그럴 의무 또한 없는 것이 예술가의 숙명이라면? 예술은 호출되지만 호출된 이의 실천은 무용하다. 하지만 무용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야말로 다분히 규범성을 따른 것이라 의심한다면, 문장은 어떤 방향을 열 수 있을까. 작가들은 부서짐 자체를 조형하여 부숨으로써 형상을, 이른바 ‘불타는 집’의 음화된 버전을 다시 만들어간다. 혹은 그렇게 부서진 채 살아내는 몸을 다시 부른다. 홀로 살아내다 부서진 몸들이 부서진 채 서기 위해서는 홀로일 수 없음을 각인한다. 이 무력하고 불온한 것들이 불온함을 품은 채로 남기 위해서는, 온전한 신뢰를 갖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움을 미리 알아야 한다. 더불어 그런 중에도 함께 걸음을 맞추고 같은 대기에 호흡을 나눠야 한다.
    
    불타버리고 시종일관 복수하고 부숴버리는 텍스트를 찾은 이들은 잔해를 마주하지만, 서둘러 글이 의도적으로 누락하는 사회의 안전망을, 아름다운 연대와 돌봄을 제안하며 봉합하지 않는다. 외려 작가들이 하는 일은 예의 누락 자체를, 폭력의 현장을, 구멍과 상처의 자리를 더듬는 것에 가깝다. 피노키오의 배경과 그의 부서진 몸, 도둑맞은 자기연민과 구원까지도 삭제하는 마음의 바닥을 살피며 그것을 조형으로 뒤집어내는 작업을 ‘애도’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하고 관계를 회복하리라는 기대보다는 불능과 무용함을 끝없이 살피는 일에 가까울 것이며, 그렇기에 예술의 기능이 치유라고 주장하는 이들과도 갈래를 달리할 것이다. 작가들은 개인의 작업을 선보이기보다 개인의 결핍을 향하고, 물성을 얻은 결핍의 형상들이 서로 간 신호를 보내는 형국을 펼쳐낸다. 저마다의 양식을 고안하는 중에도 작업들은 서로 간 주파수를 맞춘다. 온전한 구원도 타락도 아닌 지대에서 절망을 뒤집되 희망과 깨우침까지도 경계하는 예술은 종교와도 다른 위치에 선다. 그의 구멍에 유령의 자리를 자처하는 일은, 무용하지만 무용함의 자리를 남기는 일이고, 불안정하지만 공동의 대기를 만드는 작업일 것이다.
     
    하면, 피노키오와 예술가가 다른 점이란 구원받을 수 없다는 회의를 부서내면서도 구원 가능성을 구제하는 대신 무용한 조형을 만드는 일일까. 구원받을 수 없고 구원하러 온 이 마저도 당신을 감시하고 통제했을 이의 선의에 기댄 것이라 판단하면서 말에 칼을 덧댄 자의 곁에 서서, 부서진 몸으로 십자가를 부수고 처절하게 구원을 부정하는 이와 함께 부서진 십자가를 껴안는 일일까. 그렇다면 전시는 본인이 써내려 간 부정성으로 가득한 텍스트를 확장하기 위해 부정의 연결을 도모하는 자리일 터. 그것이 전시가 던지는 수라면, 작가들은 소설 속 여우와 고양이를 향해 가한 폭력처럼 타인의 발을 자르고 눈을 뽑지 않으면서, 더불어 청산가리를 먹이고 불태워 모조리 지워버리지 않으면서도, 던져진 텍스트와 패를 겨루며 경청과 오독을 병행하며 응전하고 있지 않을까. 전시는, 공동체와 연대라는 미명과 착취와 위계의 부정성 어느 쪽에도 머무르기를 유보한다. 그것은 피노키오의 죽음으로부터, 누군가 죽었음을 확인하기보다 살려내지 못함에 끝없이 방점을 찍으며 부러진 자국을 더듬는 자국을 남기는 일에 가깝다.
    
    
    
    (출처 = 에스더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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