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024.05.03 - 2024.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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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11:00 - 18:00 |
장소| | A-Lounge 에이라운지/서울 |
주소| | 서울 종로구 부암동 239-9/2층 |
휴관| | 일, 월 |
관람료| | 무료 |
전화번호| | 02-395-8135 |
사이트| | 홈페이지 바로가기 |
작가| |
류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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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egg 어떤 방황을 하더라도 결국 우리는 인류의 일원이다.. 나는 좋은 미술은 우리에게 지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창문이라고 꾸준히 강조해왔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세계’는 곧 작가가 만든 세상이며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일 테다. 많은 미술 작품들이 삶의 다양성과 가치를 저마다의 그릇에 담고 있지만, 어떤 미술은 희한하게도 천차만별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가 한참을 탐험하게 만든다. 류노아의 회화를 보고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오랜 시간 그의 작품 속에서 헤매고 항해해야만 했다. 중세시대부터 동시대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유럽의 끝자락부터 내가 사는 서울의 구석진 동네까지…류노아의 회화에서 만난 장소와 인물들,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은 내 심연에 들어와 함께 살면서 다시 그 이미지들에 대해 곱씹어 생각하게 했다. 이런 과정은 늘 기쁘게 버거웠다. 거대한 미술사의 흐름과 화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믿는 사람들은 어디서든 자신이 추구하는 환영을 찾는다. 우리 중 누군가는 류노아의 회화에서도 자신이 아는 미술사 속 이미지를 보물찾기처럼 발견해낼 것이다. <eye> 에서는 미국의 화가 앤드류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 속 쓰러져있는 연약한 존재를 찾아내고, <fin>이나 <Shelter> 에서는 중세시대나 고대 그리스·로마의 삽화 속에 등장할 만한 반인반수를 마주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본 류노아의 작업실은 ‘고전 이미지 사냥꾼’ 의 비밀스러운 요새 같았다. 류노아는 거대한 미술사의 시간과 대륙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본인이 마음에 드는 이미지들을 사냥해 작업실 곳곳에 붙여 놓고 그 이미지들을 마법 수프처럼 다시 끓여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한다. 그렇다면 류노아가 미술의 역사에서 사냥한 이미지들은 어떤 의미로 작용해 두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 작품들에 영향을 주었을까? 이번 전시의 제목 «egg»는 작품들을 감싸고 있는 ‘알’ 같은 형태로부터 시작되었다. 완전한 대칭도 아니고, 완전한 구(球)도 아닌 류노아가 택한 이 새로운 egg는 미술의 역사상 최초로 추상 작업을 한 것으로 알려진 스웨덴의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작품 <인식의 나무> 1913 에서 영감받았다. 아프 클린트의 작품 속에서 존재하는 원형의 실루엣은 버섯 같기도 하고 해파리 같기도 하며 북유럽 신화의 기반이 되는 거대한 우주목 위그드라실(yggdrasil)의 형상을 하고 있다. 류노아는 아프 클린트의 이 우주목 형상을 자신의 회화 안으로 합류시킴으로써 작가가 제안하는 틀이자 구획으로 활용한다. 대표 작품들에 반복되는 이 egg는 류노아만의 회화적 제식(祭式)으로 여겨진다. 마치 역사를 이겨낸 대성당의 튼튼한 돔처럼 류노아의 egg는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자신의 회화 안으로 들어오라고 재촉하며, 새로운 세계로 기꺼이 입장하고 싶은 기묘한 문의 역할이 되어주고 있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작품인 <egg>에서는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 웅크린 채 누워있다. 꿈과 현실이 녹아든 듯한 장소에서 하늘은 장엄하게 빛을 내리고 먹구름은 곧 퇴장할 기세다. 수호천사와 악마로 보이는 존재가 egg의 경계에서 인간을 지켜보고 있고 발 없는 용의 몸을 한 생명체도 인간에게 서서히 다가가고 있다. 이렇듯 류노아가 그린 세계는 환생과 소멸, 발전과 쇠락, 자연과 문화, 신앙과 현세의 의미를 평형한 진리로 품고 있다. <eye> 에는 좌절과 친구가 된 듯한 인간이 이름 모를 벌판에 홀로 남아있다. 앞서 말한 앤드류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에서 쓰러져있는 크리스티나에서 영감을 받은 이 인물은 미술사에서 다시 끄집어낸 이미지의 파편이지만 류노아의 세계관에서는 다시 일어나 능동적으로 살아갈 존재로 보인다. 미술사 속의 이미지들을 사냥하는 과정에 대해 류노아는 뚜렷한 목적을 담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지들을 모은다고 표현했다. ‘즉 고전의 이미지를 사냥하는 자’로서 동시대 미술을 대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의 특별한 점 중 하나는 드로잉의 ‘재창조성’이다. 대부분 화가는 캔버스에 회화 작업을 하기 전 습작이나 아이디어 스케치용으로 드로잉을 하지만 류노아는 이와 반대다. 류노아는 회화를 그린 후 드로잉을 다시 제작한다. 여기서 ‘제작한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류노아의 드로잉이 산발적이거나 빠른 시간 동안에 캐치하는 크로키식 성질을 지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류노아의 드로잉은 인식과 확신의 과정이다. 그는 드로잉을 하나의 종이만을 가지고 하지 않는다. 같은 종이여도 더 창백한 백색과 조금 노란 미색의 종이, 마스킹 테이프 등을 활용해 본인이 그려낸 회화 작업을 다시 재창조한다. 이 과정에서 류노아는 드로잉과 데꼴라쥬, 컷-아웃을 결합한다. 결과적으로 유화 작업에 앞서 진행하는 ‘과정으로서의 드로잉’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회화적 세계를 스스로 한 번 더 묘사함으로써 중복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결국 재창조된 드로잉으로 인해 류노아가 만든 세계는 더욱 확고해진다. 앙드레 말로가 《침묵의 소리》에서 예술은 ‘형식으로 다른 형식을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류노아는 자신의 회화를 드로잉과 데꼴라쥬, 컷아웃 형식을 결합해 재탄생시킴으로써 자신의 회화적 세계를 정복하는 일을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인 <fin>을 다시 보자. 한 사람이 끝없이 걸어가고 있고 저 멀리 누군가는 걸어오는 자를 기다리고 있다. 시대의 소음 속에서 잠시 겁먹고 지쳐버린 우리는 류노아가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처럼 어딘가를 서성거리다가, 무엇인가를 찾다가, 거닐다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서 목적지를 향해간다. 류노아의 회화에서 만나는 미술의 역사에서 숱하게 창조와 재창조된 이미지들은 우리가 어떤 방황을 하더라도 결국 인류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글 / 소통하는 그림연구소 대표, 미술 에세이스트 이소영 (출처 = 에이라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