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024.03.08 - 2024.0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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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11:00 - 18:00 |
장소| | A-Lounge 에이라운지/서울 |
주소| | 서울 종로구 부암동 239-9/2층 |
휴관| | 일, 월 |
관람료| | 무료 |
전화번호| | 02-395-8135 |
사이트| | 홈페이지 바로가기 |
작가| |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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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정보
고요 속의 진동 김미경 작가의 미니멀(minimal)한 작업들은 시처럼 아름답지만 동시에 ‘완고해’ 보인다. 도무지 뚫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인다. 단단한 구조와 치밀한 설계 위에서 완성된 듯한 종류의 완고함. 그러나 이 첫인상은 절반의 진실과 절반의 오해 위에 있다. 화면 속 요소 하나하나 작가의 선택과 허용을 통해 존재하는 듯한, 즉 나태함이나 어리숙함에 타협하지 않은 결과물로서의 탄탄함과 견고함은 진실이요, 치밀한 설계와 의도 속에서 작업의 전 과정이 이뤄졌으리라 보는 것은 오해라 할 수 있겠다. ‘오해’를 해소하고 나면, 맨 처음 느꼈을지 모르는 ‘완고함’은 아우라(aura)를 내포한 ‘고요 속의 진동’으로 바뀌어 보인다. 작가가 만들어 낸 고도로 절제되고 정제된 화면들은 표피적 인상과는 꽤 다르다. 즉, 우연한 만남과 발견을 모티프(motif)로 삼기, 감각에 의존하기, 즉흥적 부름에 따라가기와 같은 태도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눈물겹도록 오랜 시간을 담보로 하는 개념의 물질화와 물질과의 사투는 자리에 앉아 행하는 지적인 계산의 힘을 능가하는 일이다. ‘칠하고, 갈고, 새기고, 기다리고, 고치는’데 사용된 길고 긴 ‘시간’은 물질과 노동 사이사이에 켜켜이 들어간 성수(聖水)와 같아 김미경의 작품을 특별하게,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고요 속의 진동 작가의 작품은 고요해 보인다. 이는 상당량 절제된 색채와 정돈된 구성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화면을 ‘가만히 깊게 마주하며 시간을 두고 보면’, 어떤 내밀한 에너지 흐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이 진동은 작가가 그려낸 일루젼(illusion)의 종류가 아닌, 길고 고된 그리고 반복적인 작업 과정들 속에서 만들어진 여러 흔적의 양상과 관련이 있다. 재료와 행위의 물리적 흔적들이 과정의 증거가 되고, 과정의 증거이자 흔적은 시간의 흔적이 된다. 그리고 이 세밀한 흔적들이 실재적인 에너지의 진동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예술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매우 비이성적인 사건이자 지극히 예술적인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고요와 함께 공존하는 진동, 고요를 침범하고 추월하는 진동, 어느새 다시 잠잠해져 고요 아래 잠기는 진동... 이들 역시 결국 작가의 공들인 시간이 녹아 난 결과이다. 작가가 투입한 시간들, 즉 작업의 본질에 다다르고자 한다면, 관람자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작품 앞에 더 오래 머물기를 제안해 본다. 단지 화면 곳곳에 세밀하게 새겨진 이미지와 남겨진 흔적을 발견하는 가시적 단계가 아닌 그 너머의 다차원적 시간을 만나기 바란다. 이는 마치 죽은 듯 잠잠한 대지에서 무릎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여야만 보이기 시작하는 작은 벌레들의 움직임, 그 자연 속 삶의 본능과 원천을 떠오르게 한다. 조우로부터 연결로 우연한 만남과 발견은 예술가들에게 좋은 영감을 준다. 일반 대중에게는 의미 없을 수 있지만, 예술가의 시선에는 평범한 사물이나 상황도 의미 있는 소재가 될 수 있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작품 제작에 독창적으로 연결하며 의미를 부여, 차후 다른 요소들과 연결하여 확장해 가는 것을 통해 특정한 양식들이 발현 될 수 있다. 특히 김미경 작가는 발견의 대상이 작가 자신과 ‘감정적 연결’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작업의 장으로 연결하는 방식을 지속하고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볼 수 없지만, 2016년부터 지속하고 있는 ‘윤동주의 하늘’ 모티프의 연작은 작가가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28세의 나이로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아픔이 ‘감옥’과 ‘하늘’의 병치를 통해 극대화되었고 ‘하늘’에 대한 개인적 서사가 만들어진 셈이다. 하늘을 위한 빛에는 고려청자의 옥색 빛이 추가되고, 사각 캔버스는 하늘 조각을 이어 붙인 듯한 회화 설치 작업으로 고안되었다. 숫자 ‘1,2,3’은 다양한 평면작업들, 그리고 비누 조각에서도 발견되는 김미경 작가의 시그니처(signature) 적 작업 요소이다. 작은 크기로 씌여지고 새겨진 탓에 가까이서만 또렷하게 보이는 이 숫자는 작가가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고자’ 시작했다고 한다. 엄마의 자식 세 명을 뜻하는 숫자 ‘1,2,3’을 빼곡히 적어 넣는 작가의 이 시니그처 작업은 극히 수행적(performative)으로 보인다. 숫자들로 가득 찬 표면은 별도의 색 면(couleur field)으로 보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엄청난 양의 노동과 시간을 투입한 결과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중세 종교화의 삼면화, 이집트 상형문자 등의 메타포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다양한 연결점을 시사한다. 그리드(grid) 역시 작가의 작업에 다양한 방식으로 걸쳐 등장하는 기본 요소이다. 작가의 그리드는 인사동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자기에서 출발 되었다. 보자기는 격자 형태의 근간을 지녔지만 어떤 것이든 감싸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며, 실제적으로는 납작하면서 동시에 입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속성을 지녔다. 작가는 보자기 혹은 조각보의 이런 속성에 착안했으며, 무엇보다 그리드가 어느 순간 작가 자신이 세상을 보는 프리즘으로 작동하는 요소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삶의 어떤 깊은 뿌리와 속성들에 닿아있는 듯한 특성이 매혹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연민, 용서, 이해, 치유 등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에 대한 무의식적, 의식적 지향과 역동의 관련성을 떠올려 본다. 투명한 생선(Transparent fish) 시리즈는 글래스 켓피쉬(glass catfish)라는 뼈가 들여다보이는 물고기를 작가가 우연히 보게 되면서 등뼈, 척추, 줄기 형태 자체를 표현한 작품이다. 다른 소재가 등장했지만, 작품의 색상과 전반적인 구성면에서 작가의 기존 작업들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물고기 자체의 서사보다는 1차적 아이디어로 다루어 졌다 볼 수 있다. 이는 작가가 작업의 방향과 형식적 근간을 줄곧 일관되게 이어 가며 그 사이사이 곁가지들을 붙이는 작업 방식의 하나로 보게 된다. 다양성 속의 일관성, 일관성 속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예술의 이상적인 추구 단계를 성공적으로 실현해 가는 과정으로 보인다. 부정과 오류를 통한 전진 김미경 작가의 작품은 아름답다. 특히 거의 흰 빛으로 보이는 절제된 화면에서 나오는 오묘한 색상과 흔적들이 주는 매력이다. 다른 색으로 식별 가능하지만, 작가는 다른 색채로 인지하거나 명명하기보다 그저 다양한 종류의 흰색으로 본다. 작가는 ‘대지의 색’(주어진 색)이라 부르는 어두운 밑칠을 기본으로 시작하고 그 위에 다양한 ‘세상의 색’(발견한 색)들을 얹고 ‘하늘의 색’인 흰색을 가감하며 얹는다. 그러나 단순한 채색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색을 바르고(applying) 갈아내고(sending) 다시 덧바르고 갈아내는 끝없는 반복의 과정을 거친다. 이 속에서 두 행위의 선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온다. 이러한 순간들에서는 색을 올리는 것은 표면을 갈아내기 위한 준비가 되고, 마찬가지로 갈아내는 것이 다음 색을 바를 준비가 된다. 이렇게 목적과 수단, 선후관계가 혼란스러워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는 저해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화면에 활력과 창의성을 부여하는 새로움의 원천이 된다. 오류는 화면 밖으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1차적으로는 단정하게 정리된 화면, 가지런히 줄 맞춰 빼곡한 숫자 군집, 차분히 가라앉은 색조들이 차분하게 보인다. 우연성, 불확실성, 모호함, 불규칙성 규칙과 질서가 근간에 위치하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작가는 땜질하고 고치는 것을 통해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을 뜻하는 틴커링(Tinkering)을 언급하며 그것을 인생에 비유했다. 실수하고 고치고 다시 반복하고 또 고치고 그 과정을 지속하는 것이 아마 인생일 것이라고, 사실, 나만 불행한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과 오류를 드러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인생의 깊은 페이소스(pathos)를 담음과 동시에 미학적 성취를 동시에 이뤄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내부는 있고 테두리는 없는 김미경 작가의 작업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반영한다. 이는 작가가 지향하는 바이고 작가의 작업 전체가 그것을 담고 있다. 이 명제는 진실이지만 거짓인 명제보다 뿌옇고 막연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고사하고 한 예술가의 작업을 아는 것에조차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제를 나는 다시 반복하게 된다. “김미경 작가의 작업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반영한다.”라고. 그 이유는 김미경 작가 그 스스로 이 명제를 실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이라고 여전히 단언할 수 없지만, 삶에 대하여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는 것, 삶은 모순으로 점철된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것, 누구에게도 녹록치 않다는 것이라는 점들을 열거해 본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이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표면 아래에 엄청난 시간의 압축과 정반합의 역설을 심어 놓았다는 사실을 되짚어 본다. 김미경 작가의 놀라운 점은, 삶의 아이러니를 담은 대부분의 다른 작가들이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단계에 머무는 반면, 삶에 대한 자신의 정의와 관념을 신체적, 물질적 실천으로도 연결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삶 그 자체를 투영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코 그 어떤 식으로건 삶을 모두 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을 열게 한다. 고치고 메꾸고 나아간다, 그저 ‘틴커링(Tinkering)을 할 뿐’이라는 태도다. 나는 이것을 내부는 있고 테두리는 없는 어떤 유기체로 상상해 본다. 테두리가 부재하므로 무한대로 외부를 향해 뻗어 나가 연결, 확장할 수 있으며, 유기체이기에 변화하는 존재로서의 작품 세계이다. ‘틀리면 고치고, 또 틀렸으면 또 고치면 되지요’라는 작가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숫자 쓰기와 같이 가장 힘든 작업을 고쳐가며 잘 완성 시켰을 때 그것이 주는 희열과 고양감이 좋았다는 작가는 아이처럼 웃었다. 언제든 몇 번이고 고치고 메워나가며 하루하루 나아가는 것, 삶은 어쩌면 그리 무거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속삭임이 한 번 더 들려온다. 글 / 김소원 (출처 = 에이라운지)